최근 음서제란 표현으로 돌기도하는 한국에서의 신분제에 대한 논의들 중에 이 책이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왜일까??? 묘하다.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무슨 추천의 글들이 왜이리 많어???
이거 책 팔아 먹기 위한 헛소리 이론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번역에 한숨이 나왔다. ^^;;
물론 내가 원서를 읽는다고 이렇게까지 이해를 하진 못하긴 하겠지만 좀 번역에 대해서 매끄럽지 못한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또 느낀 것은 '피터의 이론'이란 책의 주장과 유사한 면을 볼 수 있었다.
Nobody에서 Somebody가 되었을 때의 상황을 예를 든 내용에서 이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도중에 눈에 들어온 내용들은…
노바디의 특징중 하나인 편협성?
'노바디가 스스로 노바이임을 잘 밝히지 않는 이유는 남들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치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싶은 바로 그 욕구 때문에 노바디는 더욱더 무력해진다. 좀처럼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지만,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리면 그들도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다. 노바디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신분 때문에 학대 받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 남을 학대하려 한다.'
노바디가 인식하는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노바디로 취급하는 세상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노바디의 땅이 가혹한 감옥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더 이상 읽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저 혼자서 비참해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노바디의 고통은 마치 동심원을 그리며 울려퍼지는 종소리처럼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간다.
하지만 그 척박하고 고생스러운 노바디의 땅에서도 끝까지 뜨거운 가슴을 잃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자신이 당한 모욕에 가슴 아파 하지만, 스스로를 패배자로 보는 시각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노바디의 땅이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정거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책 내용에서 자신의 얘기를 고백하듯 전달한
'섬바디의 위상에 집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노바디에 안주하는 것만큼이나 무익하고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단 위에서 내려올 능력이 없는 섬바디는 결국 조각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섬바디가 된다는 것은 실로 노바디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지만, 그와 똑같이 다시 노바디로 돌아오는 것 역시 섬바디의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패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자극하거나 정확하고 엄격한 기준을 지키도록 강조해 준 선생님에게 가장 애착이 가게 마련이다. 우리의 내면적인 가치를 찾아내어 우리 자신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준 선생님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멋진' 선생님보다는 '무서운'선생님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자신의 실수를 학생들 앞에 당당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새로운 발전의 계기로 삼는 선생님을 사랑한다. 일단 실수를 인정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허세를 부리는 대신 새로운 경험에 대한 부담을 털어버릴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창의적인 삶을 영위하는 비결을 터득하게 된다.
'마이더스 머플러'의 사장을 지낸 고든 셔먼(Gordon Shemain)은 이런 글을 남겼다.
자존심의 상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성공 속에서 실패가 차지하는 역할을 이해하고 나아가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바디들에게 격려
세간의 온전한 평가는 우리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고 난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아직 개발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그것을 실제로 세상에 내놓을 때가지는 몇 년, 때로는 몇 십 년의 시간이 걸린다. 불과 몇 달 만에 그런 과정이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노바디의 땅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실수와 실패를 교통위반 딱지가 아닌, 도로 표지판으로 삼아야 한다. 윈스턴 처칠은 "지옥을 지나가야 한다면, 계속 가라"라는 충고를 남겼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는 자신의 책상 앞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붙여두었다고 한다.
"실패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그리고 여기에 더 붙인다면 "실수한 사람은 뭐라도 한 사람이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실수를 터무니 없이 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실수를 통해서 다음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듯 하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구성원들이 과연 이런 집단적 대처에 이해가 있느냐??? 아니 이해뿐이 아니라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은 성적위주의 교육에 집착한 나머지 숲은 못보고 나무만 보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다.
지금의 학생들이 과연 영어 한마디는 과연 더 잘하고 수학 계산은 더 잘 할진 모르지만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해야할 것들에 대한 고민들이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 20대 젊은 처자와 잠시 얘기에서 군대가 왜 필요하느냐란 말에서 좌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도 어떤 비하를 해서 이렇게 좌절로 느낀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너무 아름다운 세상만을 봐와서
현재 국가간의 어떤 관계이고 그래서 필요로 하는 군대의 의미를 이해를 못해서란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서 좌절을 느낀 것이다.
이런 학생들과 이런 국민들에게 참여의 권유는 참으로 쉽지 않은 길일듯 하다.
또 자기 자신의 한표에 대한 무심함...
생각이 없으니 한표에 힘을 모르나 보다 하는 자포자기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에게 어떤 방향을 설명하고 그 것에 동조하는 것을 설명하기 보다는
뭐랄까 감성적인 것에 더 설명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뭐랄까 단순한 국민들에게는 바로 앞의 떡밥에 바로 휘둘리는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이란 생각이든다.
되려 이런 떡밥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우매한(?) 국민들은 이런 말을 하지...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요???"
"저분이 어떤 분이신데..."
이럴 때 난 차암~~~ 이란 속으로의 한숨이 나온다.
여론의 의미 그리고 공감대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그 사람들의 수가 전체의 과반수가 넘기 시작 할 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글로는 알아도 몸으로 가슴으로 알고 있지 못한듯 하다.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활발한 논의란 것들이 건전한 논의들이 이뤄져야 하는데
누구누구의 편... 누구누구의 친구... 누구누구의 자식...
이런 대만민국의 구성원들을 키우는 교육기관들은 역시나...
실적에 치우칠수 밖에 없으니 학교로서의 최고의 성공이랄 수 있는
"입학 할 때 보다 더 큰 공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교문을 나서도록 하는 것!"
이란 저자의 말은 의미 없는 말로 전달 될 듯 하다.
근데 웃긴건 사실 교육의 처음과 끝은 사실 가정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보통 한국의 부모들은 '어린게 뭘알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일단 대학은 가고 보자!',
'대학 가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인생은 학교 후가 더 중요한 것인데 이런 것들이 교육의 가치가 되니
창의성은 전혀 발휘 할 수 없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란 그분들의 시대의 가치관을 주입 시켜주고 있으니
과연 이런 아이들이 누군가가 시킨 단순한 일들은 잘 할진 몰라도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헤쳐갈 수 있을까??
영국의 소설가 E.M. 포스터는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환호」라는 유명한 수필에서, "하나는 그것이 아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초판에는 '자연선택이라는 방법에 의한 종들의 기원에 대하여, 또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서
선택된 종들의 보존'이라는 아주 긴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진화 또는 다른 여러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들, 예를 들어 진화와 같은 개념들이 다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선 진화라는 개념은 종들의 가지치기라는 맥락 또는 종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맥락을 벗어나서 '우주나 별들의 진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 별들의 발생에 진화라는 개념을 사용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두 번째로 빈번한 다윈의 개념에 대한 오해는 다윈의 책에 붙여진 이 긴 제목의 마지막 세 단어 "Struggle for Life"의 번역상의 문제로부터 생긴다.
이 영어 단어의 개념은 모든 생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긍정적인 뜻도 포함되는데,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존재를 위한 투쟁'과 같은 과격한 의미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이 변형된 의미는 선동적인 철학이나 정치를 지지해주는 이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력을 경쟁(투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번역인가 하는 점은 [종의 기원] 제 3장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윈이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경쟁이란 '은유적인 의미'로 이해 하여야 된다는 말과 더불어 구체적인 예까지 동원하여,
생존경졍은 "생물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위글에서 보면 선동적 철학이나 정치를 지지해주는 이념의 역할이라고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우리나라의 한국의 정치에서는 어떤가...
한국이란 생태계에서 "인간들 간의 상호 의존성"은 무시되고 있지는 않는지...
남보다 부지런하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코코 샤넬'의 말 처럼 이건 부자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전세계 최빈국중 하나인 캄보디아이다.
여기서 내가 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너희들이 못사는 이유는 부지런하지 않아서야란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고민스럽다.(실제로는 여기 캄보디아 사람들 정말 부지런하다.-우싸-)
지구상에서의 인간들의 생태계로 보는 구도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너희는 도퇴되어야 하는 존재들이야라고
그리고 내가 생존하는 이유는 내가 부지런 해서 아니면 내가 저 우수해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 세계 생태계에서의 인간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 그리고 그 노력은 각 인간들 간의 상호 의존성에 기반해야 하는 것
이 것을 놓치고 있는 듯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우시카(영화말고 만화책)에서 인간들의 무지함으로 고도화된 문명들이 자연을 망치고 그리고 인간들을 망쳐서
거대한 죽음의 바다 부해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생각이 난다.
그 부해안에서의 공포의 존재들도 하나의 생태계의 일부라는 내용은
이미 그는 몇 십년전에 이런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이해한 것이리라.
나의 편협한 인간관계와 괴팍한 성향은 이런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이해 못해서 인듯 하다.
오늘도 나의 묘한(?) 편협하고 괴팍한 성질은 삽질을 또 한다.
......
한가지 더 추가
스위스처럼 고도로 현대화된 사회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게 되는 것일까? 왜 자살은 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사인이 되었을까?
이런 현상을 진화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원인이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해석을 내 놓았다.
자연도태를 통한 진화의 선택적인 과정은 우리 인류에 분명히 경쟁자로서의 기질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기질로서 이전 친족 집단 또는 작은 마을 공동체에서의 경쟁에 적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단 몇 사람만을 경쟁에서 따돌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현대 인류는 방송 및 책을 통해서 또 다른 인간상들을 제시 받는다.
그 인간상에서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자질과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우 비관적으로 보게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비관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망하고 자기 자신과 현재의 삶에 점점 박탈감을 느끼게 되어, 급기야 우리들의 충족 심리를 다른 곳에서 채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정의된 현재 인류의 절망 심리가 결정적으로 팽배해진 시기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모든 가정에 TV가 보급되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비슷한 시기인 1950년대에 교외 지역에 거주하는 중산층 여성들의 술 소비량이 폭증했으며, 그들 자녀들의 절도 행위도 눈에 띄게 늘었다.
유전자의 정보들은 현대 인류의 삶을 전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유전자와 유전자에 담겨 있는 인류의 생물학정 기원을 거부하는 삶이 오히려 현재 인류의 문명을 병들게 한다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이상에서의 그의 견해를 보면 현재의 내가 하고 있는 행태도 여기에 관련이 있지 않을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들은 수많은 성공들에서 도전 의식보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까?란 생각이다.
또 그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대학교에서의 선생이란 직함…
이런 것에 잠시 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많은 동료 단원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의 나란 존재는 하찮은 존재였다가 이곳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 받으면서 너무 취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 곳에서 생성되었던 확대 또는 강화된 자존감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면 이 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취해서 자신의 행동이 현지사람들에게 뿌리 깊은 상처만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란 우려도 든다.
무심코 학생들에게 목표를 좀 더 높게 가지게 하기 위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힘든 과목은 하지 않고 쉬운 과목만을 하려 하기에
쉬운 과목의 내용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면 1년 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게 되어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모토 기사의 예를 들었다.
이게 잘 못이었다.
무심코 했던 이 말이 정말 큰 상처를 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고생해서 벌은 돈으로 학생들의 학비를 대고 있는 아버지들이
모토 기사들이었으니…
공부 열심히 해라
대부분의 너네들은 모토에 문제가 있으면 수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가능한가란 질문이란 측면에서는 쓰지만 바른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그들의 가족, 가장, 그들을 은연중 무시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 이런 실수를 하면 보내는 이곳의 생활… 미래의 내 삶에 이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볼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