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음서제란 표현으로 돌기도하는 한국에서의 신분제에 대한 논의들 중에 이 책이 나의 손에 들어온 것은 왜일까??? 묘하다.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무슨 추천의 글들이 왜이리 많어???
이거 책 팔아 먹기 위한 헛소리 이론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번역에 한숨이 나왔다. ^^;;
물론 내가 원서를 읽는다고 이렇게까지 이해를 하진 못하긴 하겠지만 좀 번역에 대해서 매끄럽지 못한 내용을 읽었다.
그리고 또 느낀 것은 '피터의 이론'이란 책의 주장과 유사한 면을 볼 수 있었다.
Nobody에서 Somebody가 되었을 때의 상황을 예를 든 내용에서 이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도중에 눈에 들어온 내용들은…
노바디의 특징중 하나인 편협성?
'노바디가 스스로 노바이임을 잘 밝히지 않는 이유는 남들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치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싶은 바로 그 욕구 때문에 노바디는 더욱더 무력해진다. 좀처럼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지만,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리면 그들도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다. 노바디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신분 때문에 학대 받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 남을 학대하려 한다.'
노바디가 인식하는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노바디로 취급하는 세상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노바디의 땅이 가혹한 감옥과도 같은 작용을 한다. 더 이상 읽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저 혼자서 비참해 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노바디의 고통은 마치 동심원을 그리며 울려퍼지는 종소리처럼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간다.
하지만 그 척박하고 고생스러운 노바디의 땅에서도 끝까지 뜨거운 가슴을 잃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자신이 당한 모욕에 가슴 아파 하지만, 스스로를 패배자로 보는 시각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노바디의 땅이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정거장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책 내용에서 자신의 얘기를 고백하듯 전달한
'섬바디의 위상에 집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노바디에 안주하는 것만큼이나 무익하고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단 위에서 내려올 능력이 없는 섬바디는 결국 조각상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섬바디가 된다는 것은 실로 노바디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지만, 그와 똑같이 다시 노바디로 돌아오는 것 역시 섬바디의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실패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자극하거나 정확하고 엄격한 기준을 지키도록 강조해 준 선생님에게 가장 애착이 가게 마련이다. 우리의 내면적인 가치를 찾아내어 우리 자신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준 선생님은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멋진' 선생님보다는 '무서운'선생님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 하지 않고, 자신의 실수를 학생들 앞에 당당하게 드러내며, 그것을 새로운 발전의 계기로 삼는 선생님을 사랑한다. 일단 실수를 인정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나면 허세를 부리는 대신 새로운 경험에 대한 부담을 털어버릴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창의적인 삶을 영위하는 비결을 터득하게 된다.
'마이더스 머플러'의 사장을 지낸 고든 셔먼(Gordon Shemain)은 이런 글을 남겼다.
자존심의 상처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성공 속에서 실패가 차지하는 역할을 이해하고 나아가 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바디들에게 격려
세간의 온전한 평가는 우리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시키고 난 다음에야 이루어진다. 아직 개발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대체로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순간부터 그것을 실제로 세상에 내놓을 때가지는 몇 년, 때로는 몇 십 년의 시간이 걸린다. 불과 몇 달 만에 그런 과정이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노바디의 땅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실수와 실패를 교통위반 딱지가 아닌, 도로 표지판으로 삼아야 한다. 윈스턴 처칠은 "지옥을 지나가야 한다면, 계속 가라"라는 충고를 남겼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는 자신의 책상 앞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붙여두었다고 한다.
"실패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그리고 여기에 더 붙인다면 "실수한 사람은 뭐라도 한 사람이다. 실수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실수를 터무니 없이 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실수를 통해서 다음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듯 하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대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구성원들이 과연 이런 집단적 대처에 이해가 있느냐??? 아니 이해뿐이 아니라 전혀 인식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것은 성적위주의 교육에 집착한 나머지 숲은 못보고 나무만 보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다.
지금의 학생들이 과연 영어 한마디는 과연 더 잘하고 수학 계산은 더 잘 할진 모르지만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해야할 것들에 대한 고민들이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전에 20대 젊은 처자와 잠시 얘기에서 군대가 왜 필요하느냐란 말에서 좌절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도 어떤 비하를 해서 이렇게 좌절로 느낀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너무 아름다운 세상만을 봐와서
현재 국가간의 어떤 관계이고 그래서 필요로 하는 군대의 의미를 이해를 못해서란 것이 나의 생각이다.
여기서 좌절을 느낀 것이다.
이런 학생들과 이런 국민들에게 참여의 권유는 참으로 쉽지 않은 길일듯 하다.
또 자기 자신의 한표에 대한 무심함...
생각이 없으니 한표에 힘을 모르나 보다 하는 자포자기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에게 어떤 방향을 설명하고 그 것에 동조하는 것을 설명하기 보다는
뭐랄까 감성적인 것에 더 설명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이 뭐랄까 단순한 국민들에게는 바로 앞의 떡밥에 바로 휘둘리는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이란 생각이든다.
되려 이런 떡밥에 휘둘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우매한(?) 국민들은 이런 말을 하지...
"성의를 무시하는 건가요???"
"저분이 어떤 분이신데..."
이럴 때 난 차암~~~ 이란 속으로의 한숨이 나온다.
여론의 의미 그리고 공감대의 형성이 이루어지고 그 사람들의 수가 전체의 과반수가 넘기 시작 할 때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글로는 알아도 몸으로 가슴으로 알고 있지 못한듯 하다.
그래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 활발한 논의란 것들이 건전한 논의들이 이뤄져야 하는데
누구누구의 편... 누구누구의 친구... 누구누구의 자식...
이런 대만민국의 구성원들을 키우는 교육기관들은 역시나...
실적에 치우칠수 밖에 없으니 학교로서의 최고의 성공이랄 수 있는
"입학 할 때 보다 더 큰 공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교문을 나서도록 하는 것!"
이란 저자의 말은 의미 없는 말로 전달 될 듯 하다.
근데 웃긴건 사실 교육의 처음과 끝은 사실 가정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보통 한국의 부모들은 '어린게 뭘알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일단 대학은 가고 보자!',
'대학 가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인생은 학교 후가 더 중요한 것인데 이런 것들이 교육의 가치가 되니
창의성은 전혀 발휘 할 수 없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란 그분들의 시대의 가치관을 주입 시켜주고 있으니
과연 이런 아이들이 누군가가 시킨 단순한 일들은 잘 할진 몰라도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헤쳐갈 수 있을까??
영국의 소설가 E.M. 포스터는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환호」라는 유명한 수필에서, "하나는 그것이 아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비판을 허용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초판에는 '자연선택이라는 방법에 의한 종들의 기원에 대하여, 또는 생존경쟁Struggle for Life'에서
선택된 종들의 보존'이라는 아주 긴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책에는 진화 또는 다른 여러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들, 예를 들어 진화와 같은 개념들이 다윈의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선 진화라는 개념은 종들의 가지치기라는 맥락 또는 종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러한 맥락을 벗어나서 '우주나 별들의 진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로 별들의 발생에 진화라는 개념을 사용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두 번째로 빈번한 다윈의 개념에 대한 오해는 다윈의 책에 붙여진 이 긴 제목의 마지막 세 단어 "Struggle for Life"의 번역상의 문제로부터 생긴다.
이 영어 단어의 개념은 모든 생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긍정적인 뜻도 포함되는데,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존재를 위한 투쟁'과 같은 과격한 의미로 변형되었다.
그리고 이 변형된 의미는 선동적인 철학이나 정치를 지지해주는 이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노력을 경쟁(투쟁)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번역인가 하는 점은 [종의 기원] 제 3장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다윈이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경쟁이란 '은유적인 의미'로 이해 하여야 된다는 말과 더불어 구체적인 예까지 동원하여,
생존경졍은 "생물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위글에서 보면 선동적 철학이나 정치를 지지해주는 이념의 역할이라고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우리나라의 한국의 정치에서는 어떤가...
한국이란 생태계에서 "인간들 간의 상호 의존성"은 무시되고 있지는 않는지...
남보다 부지런하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코코 샤넬'의 말 처럼 이건 부자들의 논리일 뿐이다.
그리고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전세계 최빈국중 하나인 캄보디아이다.
여기서 내가 저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너희들이 못사는 이유는 부지런하지 않아서야란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고민스럽다.(실제로는 여기 캄보디아 사람들 정말 부지런하다.-우싸-)
지구상에서의 인간들의 생태계로 보는 구도에서 내가 말하는 것은
너희는 도퇴되어야 하는 존재들이야라고
그리고 내가 생존하는 이유는 내가 부지런 해서 아니면 내가 저 우수해서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 세계 생태계에서의 인간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 그리고 그 노력은 각 인간들 간의 상호 의존성에 기반해야 하는 것
이 것을 놓치고 있는 듯 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나우시카(영화말고 만화책)에서 인간들의 무지함으로 고도화된 문명들이 자연을 망치고 그리고 인간들을 망쳐서
거대한 죽음의 바다 부해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생각이 난다.
그 부해안에서의 공포의 존재들도 하나의 생태계의 일부라는 내용은
이미 그는 몇 십년전에 이런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이해한 것이리라.
나의 편협한 인간관계와 괴팍한 성향은 이런 '존재들 간의 상호 의존성'을 이해 못해서 인듯 하다.
오늘도 나의 묘한(?) 편협하고 괴팍한 성질은 삽질을 또 한다.
......
한가지 더 추가
스위스처럼 고도로 현대화된 사회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게 되는 것일까? 왜 자살은 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사인이 되었을까?
이런 현상을 진화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원인이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해석을 내 놓았다.
자연도태를 통한 진화의 선택적인 과정은 우리 인류에 분명히 경쟁자로서의 기질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 기질로서 이전 친족 집단 또는 작은 마을 공동체에서의 경쟁에 적응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었다.
단 몇 사람만을 경쟁에서 따돌리기만 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현대 인류는 방송 및 책을 통해서 또 다른 인간상들을 제시 받는다.
그 인간상에서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자질과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우 비관적으로 보게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비관적으로 본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망하고 자기 자신과 현재의 삶에 점점 박탈감을 느끼게 되어, 급기야 우리들의 충족 심리를 다른 곳에서 채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정의된 현재 인류의 절망 심리가 결정적으로 팽배해진 시기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모든 가정에 TV가 보급되었던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또 비슷한 시기인 1950년대에 교외 지역에 거주하는 중산층 여성들의 술 소비량이 폭증했으며, 그들 자녀들의 절도 행위도 눈에 띄게 늘었다.
유전자의 정보들은 현대 인류의 삶을 전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유전자와 유전자에 담겨 있는 인류의 생물학정 기원을 거부하는 삶이 오히려 현재 인류의 문명을 병들게 한다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이상에서의 그의 견해를 보면 현재의 내가 하고 있는 행태도 여기에 관련이 있지 않을지…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들은 수많은 성공들에서 도전 의식보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지는 않았을까?란 생각이다.
또 그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대학교에서의 선생이란 직함…
이런 것에 잠시 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많은 동료 단원들 또한 그렇지 않을까 한다.
한국에서의 나란 존재는 하찮은 존재였다가 이곳에서 특별한 존재로 인식 받으면서 너무 취한(?) 것은 아닐까…
물론 이 곳에서 생성되었던 확대 또는 강화된 자존감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면 이 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취해서 자신의 행동이 현지사람들에게 뿌리 깊은 상처만을 남기는 것은 아닐까란 우려도 든다.
무심코 학생들에게 목표를 좀 더 높게 가지게 하기 위해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힘든 과목은 하지 않고 쉬운 과목만을 하려 하기에
쉬운 과목의 내용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면 1년 후 그리고 그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게 되어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모토 기사의 예를 들었다.
이게 잘 못이었다.
무심코 했던 이 말이 정말 큰 상처를 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면 고생해서 벌은 돈으로 학생들의 학비를 대고 있는 아버지들이
모토 기사들이었으니…
공부 열심히 해라
대부분의 너네들은 모토에 문제가 있으면 수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가능한가란 질문이란 측면에서는 쓰지만 바른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그들의 가족, 가장, 그들을 은연중 무시한 발언이었던 것이다.
하루 하루 이런 실수를 하면 보내는 이곳의 생활… 미래의 내 삶에 이런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볼란다.
Well you done done me
and you bet I felt it
I tried to be chill
but you're so hot that I melted
I fell right through the cracks
and now I'm trying to get back
Before the cool done run out
I'll be giving it my bestest
Nothing's going to
stop me but divine intervention
I reckon it's again my turn
to win some or learn some
but I won't hesitate
no more no more
It cannot wait I'm yours
Well open up your mind
and see like me
Open up your plans
and damn you're free
Look into your heart
and you'll find
love love love love
Listen to the music of the
moment people
and dancing with us
one big family
It's your God forsaken
right to be loved love
loved love loved
So I won't hesitate
no more no more
It cannot wait I'm sure
There's no need to complicate
Our time is short
This is our fate I'm yours
I've been spending way
too long checking
my tongue in the mirror
And bending over backwards
just to try to see it clearer
My breath fogged up the glass
And so I drew a new face and laughed
I guess what i'm a saying
is there ain't no better reason
To rid yourself of vanity
and just go with the seasons
It's what we aim to do
Our name is our virtue but
I won't hesitate no more no more
It cannot wait I'm your
open up your mind
and see like me
Open up your plans
and damn you're free
Look into your heart
and you'll find
the sky is your so free
don't frees don't frees don't
there No need to complicate
cause Our time is short
this so this so this is afraid
I'm yours
▷ 성격
실력을 겸비한 만능 타입입니다. 사업가에게 있어 최상에 가깝다든가
예술가에게 딱이라는 에고그램들은 있지만 그것은 그런 방면에서만 이상적인 타입입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만능이라 할 수 있는 에고그램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이 타입은 그런 만능에 가까운 정신구조를 지니고 있어 만병통치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타입에 대해서는 거의 흠을 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할 것은 테스트의 0X에 희망사항이 섞여있지는 않았나 다시 한번
재고해 보는 것입니다. 이런 대단한 결과는 쉽게 나을 리 없습니다. 테스트 시 단순한 바램이 적용되지 않았나 점검해 보도록
하십시오.
▷ 대인관계 (상대방이 이 타입일 경우 어떻게 하연 좋을까?)
연인,
배우자 - 이런 멋진 상대가 자신의 배우자가 되어 준다면 만세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단, 그 다음이 진짜문제로, 정말 그런 훌륭한 배우자가
자신과 어울릴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합니다.
거래처고객 - 이런 타입과의 관계를 망친다면 나쁜 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주판을 잘못 퉁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상사 - 어느 정도 당신을 높이 사주었다고 모두 자신의 실력이라 우쭐해 한다면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평가는 어느 정도 감안하여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동료, 부하직원 - 어떤 부서든,
어떤 내용의 일이든 성격적인 면에서 볼 때의 적합, 부적합은 없습니다. 다만 매사에 깊이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는, 만능선수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단점에는 특히 신경을 써야합니다.
여러분과 인연을 맺은 지 만 9년, 원장의 직을 맡은 지 1년 반, 여러분과 함께 많은 일을 하며 때로는 같이 즐거워하고 때로는 같이 힘들어 하고 때로는 같이 분개하기도 했던 값진 추억을 갖고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 금융연구원이 국내의 대표적인 금융정책 두뇌집단(Think Tank)으로, 또한 국내의 독보적인 금융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떠납니다.
1년 반 전, 제가 원장에 취임하면서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금융연구원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연구기관으로 한 단계 더 발전시키자고.
금융연구원의 발전은 국내 금융정책의 수준을 높이고 우리 금융산업을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그러나 이 일은 제가 원장으로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연구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원장의 몫은 여러분들이 소신껏 오직 여러분의 학자적 양심과 신념에 따라 연구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일입니다.
때로는 외풍을 막아주고, 때로는 여러분을 대신해서 외부의 부당한 압력에 대항해 싸우는 일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입이 되고, 때로는 여러분의 손과 발이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저는 지난 1년 반 원장으로서의 제 몫의 일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제 임기를 절반 밖에 채우지 못하고 오늘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을 더 이상 지켜드리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을 안고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한갓 쓸데없는 사치품 정도로 생각하는 왜곡된 ‘실용’ 정신, 그러한 거대한 공권력 앞에서 이제는 제가
더 이상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짐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금융연구원을 떠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연구원을 정부의 Think Tank(두뇌)가 아니라 Mouth Tank(입) 정도로 생각하는 현 정부에게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은 한갓 사치품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책실패의 원인을 정책의 오류에서 찾기보다는 홍보와 IR에서 찾는 현 정부의 상황 판단 앞에서, 잘된 것은 모두 내 탓이요
잘못된 것은 모두 네 탓이라고 보는 현 정부의 인식 앞에서, 결정은 내가 할테니 너희들은 그저 일사불란하게 따라오기만 하라는 현
정부의 일방통행식 밀어붙이기 사고방식 앞에서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은 비판의 잘 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이 현 정부의 갈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니, 비판이 아니더라도 정부의 정책을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는 연구원이나 연구원장은 현 정부의 입장에서는 아마
제거되어야 할 존재인 것 같습니다. 경제성장률 예측치마저도 정치 변수화한 이 마당에 그것은 아마 당연한 일이겠지요.
돌이켜 보면 정부의 정책이 지금처럼 이념화된 적도 흔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책의 논의 과정이 생략되고 사고와 아이디어의 다양성이 이처럼 철저히 무시된 적도, 아니 봉쇄된 적도 흔치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가 민주화된 이후에는 말입니다. 경제적 논리와 경험적 증거보다는 주의와 주장만 난무하는 무리한 정책, 네 편과
내 편을 가르는 정책,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기보다는 특정 집단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정책, 그 앞에서 사고와
아이디어의 다양성이 인정될 수가 없겠지요. 이에 근거한 활발한 정책 토론 또한 불편하겠지요.
여러 가지 사례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현 정부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금산분리 완화정책을 살펴봅시다. 재벌에게 은행을 주는 법률 개정안을 어떻게 ‘경제살리기 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개혁입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국제적 조류라고 감히 주장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나라가 전세계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금산분리가 가장 철저한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정부의 주장과는 달리,
그리고 일부 보수집단 금융이론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전세계 선진국에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가 가장
많이 허용된 나라입니다. 그 폐해도 가장 많이 경험한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은 외국의 경우 은행이든 증권사든 보험회사든 산업자본의 지배 아래 있는 세계적 금융기관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직 산업자본의 지배 아래 있는 세계적 은행, 세계적 증권사, 세계적 보험사의 예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은행을 제외하면 증권, 보험 등 제2금융권의 주요회사들은 거의 대부분 산업자본
즉, 재벌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이래도 저희 나라가 전세계에서 금융과 산업이 가장 철저히 분리된 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불행히도 재벌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나라의 증권사, 보험사들은 비록 국내시장에서는 1류 행세를 하지만 국제시장에서는
2류, 3류 수준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재벌의 소유를 금지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증권사, 보험사가 세계시장에서 2류, 3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래도 재벌의 은행소유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이 국제적인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주장하기 전에 우선 재벌들은 자기들이 소유한 증권사, 보험사를 국제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금융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은행을 재벌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마치 프리메라 리그의 꼴찌 축구팀에게 야구를 하도록 해주면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될 거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이론을 내세우기도 전에 이런 평범한 상식적 결론을 현 정부는 왜 진솔하게 인정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희 연구원으로서는, 그리고 저 개인으로서도 -- 원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금융학자로서 -- 정부의 금산분리 완화정책을 합리화할 수 있는 논거를 도저히 만들 재간이 없습니다. 정부의 적지 않은 압력과 요청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재벌의 은행소유를 허용하는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등 개정안은 금융분야에서의 대운하 정책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번 국토를 파헤치고 나면 파괴된 환경을 되돌릴 수 없듯이 일단 은행이 재벌의 사금고가 되면 이를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환경파괴의 영향이 모든 국민에게 미치는 외부불경제성(external diseconomies)과 마찬가지로 은행의 사금고화도
금융체제 위험(systemic risk)을 높이는 외부불경제성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파괴된 환경은 사후 감독이나 제재로 쉽게
복구되지 않듯이 은행 사금고화의 폐해도 현 정부와 일부 보수 금융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후 감독이나 제제를 강화한다고 쉽게
방지되거나 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운하 정책이나 금산분리 완화정책이 쉽게 포기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 혜택이 특정 집단에 집중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정집단의 이익이 상식을 압도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밖에 달리 결론지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4대강 정비사업이라는 명분으로 삽질을 하다가 나중에 슬쩍 연결하면 대운하가 된다고들 합니다. 재벌의
은행소유한도를 4%에서 10%로 올려 일단 발을 들여놓고 나서 나중에 슬쩍 조금만 더 풀어주면 되니까 이것도 닮은꼴입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우리의 경제위기로 키우고 있는 정부의 거듭된 오판과 실정이 또 다른 사례가 되겠지요. 전국민이 합심해서 글로벌
금융위기에 총력 대응해도 부족할 때입니다.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진지한 논의를 거쳐 국민의 의지가 정책으로 결집되어야 할
때입니다. 정부는 허심탄회하게 귀를 열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좌-우, 진보-보수, 네 편-내 편, 네 탓-내 탓 가르기에 집착하다 보니 정부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정부는 다양한 의견의 자유로운 표출과 논의를 막고 싶은 것 같습니다. 위기상황에 대한 판단마저도 정책적으로 왜곡되고
수시로 번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책대응에도 실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서로 상충되는 정책이 남발되는 것 같습니다. 위기는
점점 더 현실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국민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연구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이럴 때 연구원 동료 여러분의
곁을 떠나는 제 심정도 착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법에 규정’된 원장의 임기를 부정하는 ‘법치’ 정부의 이중
잣대(double standard) 앞에서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달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위해 원장의 임기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희생하는 대가로
연구원의 원장직을 더 연명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원장의 직은 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원의
발전을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근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서 제 후임으로 어떤 분이 오실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어떤 분이 원장으로
오시든 여러분께서는 동요하지 마시고 조용히 연구에 매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여러분께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연구원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원장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원장으로 재임했던 기간 중에도
연구원을 이끌어 왔던 것은 제가 아니고 여러분이었습니다. 저는 단지 여러분을 도와드리는 역할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정부의 요구에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됩니다. 금융연구원의 품격을 유지해야 합니다. 금융연구원에 대한
외부의 신망과 신뢰를 유지해야 합니다. 긴 세월을 두고 보면 그래야만 우리 금융연구원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국가와 국민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한동안 쉽지 않은 시절이 금융연구원에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이 세상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이 금융연구원의 꽃을 피우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는 비록 금융연구원을 떠나기는 하지만 동료 여러분을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뜻을 같이 하는 학자들이 한 평생을 같이 하듯
저는 여러분과 평생을 같이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동료로서 또한 선배로서 저는 금융연구원을 떠나서도 금융연구원의 발전을 위해
여러분과 같이 노력할 것입니다. 금융연구원을 금융연구자들의 품으로 되찾을 때까지 .....